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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염불기도 /대행스님

[대행스님]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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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스님 :

 

불성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설사 우주가 무너지고 허공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지거나 죽어질 수 없다.

 

 

불성은 말이나 생각으로 잡히지 않는 미묘 불가사의한 것이다.

한 점 찍어서 맛을 볼 수도 없는 허공처럼

형상과 감각을 초월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불성은 언어와 명상을 초월하여

홀로 뚜렷이 밝으며 난바도 없고 그리하여 무너질 바도 없다.

당당하고 밝고 꿋꿋하다고 말할 수 있다.

불성은 말을 떠나 있고 이름을 떠나 있고 글자를 떠나 있고

형상을 떠나 있고 변화를 떠나 있으니 평등하고 동일하여 변화나 차별이 없다.

 

 

불성은 이름해서 붙일 자리가 없다.

흘러옴도 없고 흘러감도 없고, 붙을 자리도 안 붙을 자리도,

그 말조차도 붙을 자리가 못 되기 때문에 바로 붙일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불(佛)이니

불성이라는 것은 나의 근본 생명, 영원한 생명, 이 우주 전체를 싸고 있는 근본처를 말한다.

그런데 자기가 그 근본처에 들어 있는 줄을 모른다.

따라서 불이 중생을 미혹케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중생이 불을 미혹케 한 것이다.

자기 성품 중의 불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

 

 

분명코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빠져 나온 것을 이름하여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이 유전자가 자꾸 변전하니 나투어 돌아간다.

만법이 불성으로부터 벌어진 것이다.

불성은 유전자 그 이전이다.

불성은 마음내기 이전의 마음이다.

 

 

불성이 만법을 머금고 있으니

큰 것이나 불성이 사람의 성품 중에 있으니 만법은 또한 자성 가운데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불성이라면

산 넘고 물건너 갖은 고난을 다 겪은 다음에

어디 머나먼 낯선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바로 내 안에 그 참 보배가 있어 설사 무식하다 할지라도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니 그러기에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참 보배가 어디 머나먼 험한 곳에 숨겨져 있다면

어찌 누구에게나 부처님과 동등한 불성이 있다고 하겠는가.

불법은 평등하고 광대 무변한 것이다.

 

 

퍼내어 써도 줄어듦이 없고,

퍼부어도 결코 한 방울도 더 늘어나지 않는

이 무량 광대한 진리의 맛은, 때로는 공공적적하여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가도

찰나에 이치에 응하여 모든 것을 바로 세운다.

평온한가 하면 일어나 소소영영하게 살아 있고,

움직이는가 하면 어느 사이엔가 측량할 길 없는 무한으로 되돌아간다.

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참 생명이기에

산다 죽는다 하는 것까지도 진리이며 자비인 것이다.

그렇게 위력있고 그렇게 광대 무변한 줄은 맛을 보지 못하고는 결코 알 수 없다.

 

 

불성은 무한의 모든 것을

다 내도 줄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만약 삼천 대천 세계 우주 전체를,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사생을 다 운집케 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불성은 물들지 않는다.

똥통에 들어간 구더기의 몸은 더럽게 물들지언정

구더기의 본성은 물들지 않는 것처럼 부처의 본성,

나의 본성, 구더기의 본성인 불성은 물들지 않는다.

 

 

해가 뜨기도 하고 자기도 하는 국토에서는

해가 뜬다 진다 하는 개념이 있겠으나

해가 본래 떠 있기만 하는 국토에서는 떴느니 졌느니 하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불성도 그와 같아 항상 밝아 있으니 사실은 밝힌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불성은 영과 다르다.

영은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모습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은 각자 생각내는 그릇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불성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돌아간다.

 

https://cafe.naver.com/occultmulder/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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